1. 5·18 민주화운동, 어떻게 시작됐을까?
배경: 1980년 5월, 광주
박정희 정권이 무너진 뒤, 국민들은 민주화를 기대했어요.
그런데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이 군사 쿠데타(12.12 사건)로 권력을 장악했죠.
이어서 계엄령 확대 → 대학 휴교령, 정치 활동 금지, 언론 통제까지 강하게 나감.
시작: 5월 18일, 전남대 앞
전남대 학생들이 계엄령 해제와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
그런데 투입된 **계엄군(특전사)**이 몽둥이와 총으로 무자비하게 진압.
시민들도 이에 분노해서 시위에 동참 → 점점 광주 전역으로 확산됨.
2. 어떻게 전개되었나? (1980.5.18 ~ 5.27)
⚠️ 5월 21일: 발포
전남도청 앞에서 집결한 시민들에게 계엄군이 실탄을 발사.
수많은 시민들이 사망하거나 부상 →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무장해서 계엄군에 맞섬.
이때 시민군이라는 형태로 조직이 생김.
️ 5월 22일~26일: ‘해방 광주’
계엄군이 광주에서 철수함 → 광주 시민들이 자치적으로 도시를 운영함.
시민들이 질서를 지키고, 음식과 약을 나누고, 부상자를 돕는 등 높은 시민의식을 보여줌.
하지만 외부와는 철저히 단절된 상태.
5월 27일 새벽: 전남도청 진압
계엄군이 다시 광주를 포위하고 전남도청을 강제 진압.
많은 시민군과 시민들이 사망하며 운동은 유혈진압으로 끝남.
3.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까?
1980년대: 침묵과 왜곡
전두환 정권은 광주를 ‘폭도들의 난동’으로 왜곡하고 진실을 은폐했어요.
시민들은 체포, 고문, 감시를 당했고, 광주는 오랫동안 고립됐죠.
1990년대 이후: 진실을 향한 싸움
민주정부(김영삼 정부) 들어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논의가 시작됨.
1995년, 전두환과 노태우는 내란죄 및 군사반란죄로 구속됨.
1997년,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 → 전두환은 무기징역, 노태우는 17년형 선고 (훗날 사면됨)
4. 그럼 시민에게 총을 쐈던 군인들은?
✅ 당시의 진압 명령
발포는 전두환을 포함한 신군부 핵심들이 내렸다는 정황이 많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인 발포 명령자를 아직도 정확히 규명하진 못했어요.
⚖️ 처벌 여부
일선 군인들 대부분은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진압에 직접 가담한 일부 지휘관들은 일부 징계 또는 면직 처분을 받았지만, 군 내부에서 조직적으로 보호받은 경우가 많아요.
이후 양심고백
몇몇 군인들이 후에 “명령에 따른 것이었지만 죄책감이 크다”는 인터뷰나 회고를 하기도 했어요.
일부는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서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5. 현재 5·18의 의미는?
5.18은 단순한 지역 시위가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의 뿌리입니다.
지금의 자유로운 사회, 투표권, 표현의 자유는 이런 시민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것이죠.
그래서 매년 5월 18일은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어 공식 추모합니다.
도움이 되셨길 바래요.